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니 달글리시 (문단 편집) === [[셀틱 FC]] === [[파일:external/s-media-cache-ak0.pinimg.com/62b141c78ccc9bf49c283b562c5e8ff3.jpg]] [[파일:external/i.dailymail.co.uk/article-2105552-11E156C4000005DC-220_306x471.jpg]]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[[레인저스 FC|레인저스]]의 서포터로서 자랐다. 밀튼 뱅크 초등학교에서 [[골키퍼]]로 시작했으며, [[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]]와 [[리버풀 FC]]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으나 입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본인이 응원하던 레인저스에 입단하기 위해 몇번이나 입단을 신청했으나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. 이후 1967년에 다름아닌 레인저스의 최대 라이벌인 셀틱과 임시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. 그의 첫 시즌은 컴버널드 유나이티드에서의 임대생활이었으며 한 시즌동안 37골의 활약을 보여준다. 다음해 셀틱과 정식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가 된 달글리시는 1968년 스코티시 리그컵 8강전 해밀튼 아카데미컬과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1군 데뷔전을 치룬다. 1971-72시즌 레인저스와의 올드펌 더비에서 [[페널티 킥]]으로 데뷔골을 기록한 후, 49경기 출장에 23골을 기록한다. 다음 시즌 달글리시는 41골을 기록하며 셀틱의 주 득점원으로 발돋움하였으며, 1972-73 시즌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컵]]에서는 팀을 4강까지 진출시켰다. 1975-76시즌에 셀틱의 주장이 되기에 이른다. 269경기 출장에 167골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달글리시는 당대 유럽 강호들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고, 1977년 당시 리버풀 감독인 [[밥 페이즐리]]에 의해 440,000파운드의 금액에 리버풀 FC로 이적한다.[* 당시 페이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. "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전에 빨리 이 글래스고를 떠나는게 낫겠다."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